북한산 산성 12성문 능선종주

2005년 11월 4일(금), 북한산성 12성문 능선종주를 하기로 하다.
오전에 일이 있어, 빨리 움직였는데도 일을 마치고 북한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넘었다.


1門 : 대서문



11:00 경, 산성매표소에 도착.
단풍구경 온 아줌마 아저씨 부대가 북한산성 입구에 가득이다.
단풍관광객들은 북한리를 거쳐, 아마도 원효봉이나 혹은 북한리 복판의 음식점과 계곡에서 놀다 가려는 듯 싶다.

대서문에 들러 포인트를 찍고 (디아블로 하는것 같다...)
나는 용암사에 들른다.
용암사 입구의 돌비석은 돌아가신 일붕 서경보 스님이 쓰신것이었다.
남한땅 어디를 가도 서경보 스님의 글씨가 없는곳은 없는 듯 하다.
오죽하면 나한테도 100호짜리 대작 서예작품이 한폭 있지 아니한가.




용암사에서 500ml짜리 수통 두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의상봉 가는 길로 접어든다.
용암사에는 관음동굴이 있는데, 동굴 한켠은 바위틈의 샘터였다.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의상봉 오르는길은 악명처럼 가파르고 험하다.
사람의 기름을 짜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겟세마니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의상봉에서 보는 원효봉과 북한산 전경은 백만불짜리라서 땀이 아깝지 않다.

의상봉 오르기 직전에 어떤 작은 명패를 하나 만났다.
주등산로도 아닌, 샛길 구석에 박혀있는 놈 인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 사람이 죽은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몇년전 이 사람이 죽은것을 들은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유해가 이곳에서 가루로 뿌려졌을 줄 이야...
잠시 숙연해져서 묵념하고, (담배 한대 피워물고 싶었으나, 피울줄 몰라서...)
잠시 원효봉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


의상봉 정상까지의 길은 참으로 험난하다.
의상봉까지만 오르면, 의상능선은 거의 다 통과했다고 봐도 된다.
험하다는 악명이 괜히 붙은것이 아니다.



한참 오르다보니 약간의 미열과 나른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몸이 풀렸는지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등산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山은 면역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이 와도, 오를때마다 힘들고 겁이 나는곳이 바로 山이다.
산을 오를때의 고통을 알기에, 오르기 시작할때마다 잠시 겁이 나곤 한다.


2門 : 가사당암문

가사당 암문은 의상봉에서 용출봉을 가다가 중간에 있다.
의상봉에서 용출봉을 바라보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내가 왜 가야하는지 또 겁이 나기 시작한다.


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으름과 자기합리화가 적합한 표현일 듯 싶다.
집에 퍼져 있을껄, 내가 여길 왜 왔지... 하는 한숨부터,
친구만나서 션~한 맥주나 마실껄... 그냥 가을단풍 사진촬영이나 갈껄...
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이렇게 많은 봉우리들이 의상능선을 이루고 있다.
백운대에서 내려다보면 별 것 아닌것 같지만,
북한산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능선미를 자랑하는 곳이 의상능선 일 것 같다.

가사당 암문이 있는 의상능선 일대는
등산객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보수공사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수백년 된 산성의 고졸함이 돋보인다.

서울시는 웬만하면 지금같은 유치한 수준의 산성 복원공사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대로 무너지지만 않게 해 두는것이 더 옛스럽고 멋있는데 말이다.

의상봉에서 용혈봉 가는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좌불이 보인다.
아름다운 산속에 인위적인 좌불이라...
일부 불자들은 그곳을 내려다보며 합장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언밸런스다.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는것과 비례해서 극락의 문도 열리는 것일까.


용출봉을 지나, 용혈봉을 지나니 증취봉에 이른다.
의상능선 봉우리들의 이름은 거의 다 불교 냄새가 난다.



3門 : 부왕동암문

증취봉을 지나자 부왕동 암문이다.
증취봉 정상에서 도시락을 먹고, 큰 대자로 누워 하늘보며 휴식을 취한다.


오늘따라 경상도 사투리가 무척 많이 들린다.
주변이 경상도 말 일색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드시는 어르신(!)들의 대화내용 역시 지방색이 짙다.

세상에 불가능한게 두가지 있는데,
스님의 머리를 빗질하는것과, 노무현 입에 자크를 채우는 것이라 한다.
막걸리에 게슴프레 풀린 눈으로, 나에게 그렇지 않느냐며 물어본다.
막걸리나 한잔 주면서 물어봤으면 뭔가 대답이라도 해 주었으련만,
우리 조선사람의 술 인심이 이렇게 야박할 줄이야...

나는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사람이 못돼서 그렇겠지만,
나한테 막걸리 한잔 주는 사람한테 찍으련다. 흐흐...

부왕동 암문은 옛날 성벽위에 복원공사를 해서, 성벽 돌의 색이 다르다.
부왕동 암문을 지나자, 나월봉과 나한봉이 이어진다.
땀은 찜질방보다 많이 나기 시작한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얼음잔에 채운 맥주 500cc 한잔에 1만원이라도 사 마실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음 동동 띄운 냉막걸리가 눈에 삼삼하다.


4門 : 청수동암문

청수동 암문으로 의상능선이 끝이 나고,
바로 문수봉이 이어진다.



수통에 물은 거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가고,
문수사에 가면 물을 마실 수 있을거란 기대로 문수봉 가는 길에 매달린다.


5門 : 대남문

대남문에 이르러, 문수사로 향한다.
오늘따라 국민대 ROTC들이 단체로 등산을 온 듯,
산 전체가 구호와 구령으로 떠나갈 듯 하다.

군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데,
덕분에 북한산 산신도 오늘 하루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대남문을 빨리 떠나고 싶어진다.





대남문은 항상 사람이 많다.
구기동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로 바글대는 곳이며,
백운대와 만경대가 잘 보이는 곳 이기도 하다.

문수사의 식수대에는
물은 떠가지는 말고, 그저 마시고만 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수통을 몇번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빈통을 배낭에 찔러넣는다.
컵으로 시원한 물을 두잔을 내리 마시고, 다시 하릴없이 산성주능선에 올라붙는다.




문수사에서 동굴안에 부처님도 뵙고 쉬다가,
대남문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 정각.
의상능선에서 체력소모를 많이 하고,
점심먹고 노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한 탓 이다.
이제 급피치를 올리지 않으면, 해 지기전에 12성문 종주는 어려울 것 같다.
출발이 너무 늦었었기 때문이다.

애고, 내 팔자야~


6門 : 대성문

대남문부터 용암문까지는 일명 '경로 우대 코스' 라고 불리는 산성 주능선이다.

대성문을 지나면서 초코바를 하나 꺼내먹고,
반병 남은 수통의 물을 다 마셨다.
이제부터 위문까지는 그저 냅다 뛰어야 한다.


거의 구보하는 속도로 산성 주능선을 뛰기 시작한다.
예전 페이스라면 대남문에서 위문까지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7門 : 보국문

보국문도 뛰면서 지나친다.
한참 뛰다보니 목마른것도 잘 모르겠다.
군기가 다시 바짝 든 모양이다.
북한산 대피소에서 물을 실컷 마실 수 있을거란 기대로
트레인 스포팅의 주인공들처럼 뛰고 또 뛴다.



8門 : 대동문

대동문 입구에는 아직도 공사장 자재와 공사건물이 남아있다.
이걸 언제나 치울지.... 걱정된다.

대동문으로 그냥 하산해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고 싶은 욕구가 그치지 않고 올라온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면서,
어쨌거나 대동문도, 동장대도 뛰면서 지나친다.




9門 : 용암문

용암문 조금 못 미처 있는 북한산 대피소의 샘터에서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을 실컷 마신다.
쉴 틈이 없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이미 4시20분이 되어간다.
용암문을 향해 뛴다.
역시.... 애고, 내 팔자야...


용암문에 도착해서 숨을 고른다.
이제부터는 고바위인데... 저 깔딱고개를 잘 넘어야 오늘 산행이 무리가 없다.
심호흡 하고, 심기일전하고,
용암문부터 노적봉 뒷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5시까지는 위문에 올라야 할텐데...


10門 : 위문

저 멀리 위문이 보인다. 하도 많이 드나들어서 낯익은 곳...
아마 저 위문을 수백번은 넘어 다녔을것이었다.

바위구간을 지나, 위문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서 위문 너머 우이동을 한번 본 후,
다시 북한리쪽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이제 시간은 5시 정각.
벌써 어둑어둑해 진다.


대남문에서 위문까지 1시간반만에 도착했다.
산에서 뛴다는건 미친짓인데,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하다.
산에서 뛰려고 산에 오는건 아닌데...
나는 느림보 산행의 열렬한 추종자인데 말이다...

무릎보호대도 안 갖고 왔는데,
의리없이....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정도 산행하고서 무릎이 아프다니, 벌써 늙은것인가.
걱정스럽다.

위문에서 약수암쪽의 가파른 하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심심해서 노적봉쪽에 '야~호'를 외쳐보니,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야~호' 하는 답신들이 들려온다.
이 능선, 저 능선에도 나같은 놈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는 증거.
괜시리 반가워진다.


11門 : 북문

약수암 지나, 대동사를 지나서, 갈림길까지 간다.
다시 오르막이다.
이미 날은 어둡고, 헤드랜턴을 꺼내 머리에 붙이고 오르기 시작한다.

어두운 탓에 염초봉 릿지는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다.
어둠속으로 원효봉의 대 슬랩이 웅장하게 다가온다.
어둠속에서 북문을 찍고, 원효봉을 너머 시구문으로 향한다.

산지 3주된 등산화가 말썽이다.
왼발 새끼발가락 부분이 아파온다.
무릎통증과 발가락까지...

원래 오늘 성문종주는 등산화 길들이려고 시작한 성격의 산행이었는데,
역시 새 등산화는 말썽을 부렸다.
이게 명색이 고어텍스에 비브람창인데...
밑창 접지력도, 착용감도 다 만족했는데, 발가락이 아팠다.

이놈을 죽여, 살려?
으이그....

북문부터는 어두워서 사진도 나오지 않았다.
원효봉의 하얀 바위살이 뿌옇게 보인다...


12門 : 서암문(시구문)

원효봉에서 시구문을 찍고, 북한산성 산성매표소쪽 방향을 잡아 성벽 옆길을 탄다.
어둠속에서 고기굽는 집 들이 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산 능선에서는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하더니만,
막상 내려오니 목살구이가 눈에 삼삼하다.

고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기도 같이 먹을 동지가 있어야 먹지...
혼자 고기 구우면서 소줏잔을 기울이는것은 거의 청승 아닐까.

다음번에 12성문 종주할때는 혼자 오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의 북한산성 성문 종주를 마친다.

눈덮인 한겨울의 의상능선은 좀 위험해서,
이제 다시 의상능선을 타려면 내년 봄이나 되어야 하겠지...

불수도북을 성공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체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나는 불암-수락-사패-도봉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만,
도봉산을 내려와 우이동 그린파크 앞에서부터는 자신이 없다.

불수도북의 마지막인 북한산 구간,
산성주능선을 지나 구파발로 하산하는,
약 4시간의 산행에서 탈진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by 한도사 | 2005/11/06 23:11 |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5/11/06 23:17
짝짝짝....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06 23:41
이정도 산행하고서 무릎이 아프다니..라니요. 전 그전에 죽었을 겁니다. -_-
Commented by 서누 at 2005/11/07 00:58
오오, 저희 동네 뒷산에 다녀오셨군요. ^^ 그런데 북악터널 쪽에서부터 타기 시작하면 가끔 맘먹고 하루 종일 타기에는 애매해서요. 저는 보통 우이동까지 택시 타고 가서 도봉산에서 시작해 북한산성입구로 내려오는 7-8시간 코스나(저는 특공대가 아니라서 -_-), 우이동에서 시작해 구기터널 비보호도로 쪽으로 해서 내려오는 3시간 코스를 즐깁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자촌이나 서오릉 쪽에서 올라가는 갓길에서는 돈을 안 받았는데, 이제 야박하게도 죄다 막아놓고, 돈을 받더군요. 돈 몇 푼 아끼려고 개구멍으로 들어가자니 체면이 안서고,,,=_=
Commented by 한도사 at 2005/11/07 12:45
네.... 언제 날 잡아서 초록불님, 폭주족님, 서누님과 함께 북한산에서 두어시간 산보라도 같이 할까요? 북한산성 입구에 좋은 술집 보아두었습니다. 삼겹살을 통으로 굽던데, 냄새가 색깔이 환상적이었어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